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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부케 캐년 산불

부케 캐년에서 성가대 세미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작은 언덕에서 커브를 도는 순간 도로 옆 비탈로 굴러 뒤집힌 차 한 대가 보였다. 중년의 백인 남성 혼자서 끙끙대며 덩치 큰 운전자를 꺼내려 했지만, 운전자는 의식을 잃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사고로 차 옆의 풀밭에는 불이 붙었다. 손으로 비벼도 바삭하고 부서질 정도로 마른 풀밭이었다. 화씨 100도가 넘는 불볕더위에 건조한 날씨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병물 서너 개면 너끈히 끌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불이었다.     운전하던 장로님은 얼른 갓길에 차를 주차했고 우린 급히 그쪽으로 뛰어갔다. 이곳의 급박한 상황을 알아챘는지 뒤차로 따라오던 일행 가운데 남자 몇 분도 달려왔다. 그 백인 남성은 친구를 차에서 꺼내 안전한 곳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이 팔과 다리를 붙잡고 들자, 머리가 땅에 질질 끌릴 것만 같았다. 얼른 달려가서 운전자의 머리를 받쳐 들고 같이 걸었다. 사람 머리가 그렇게 무거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     이 차선 도로 한쪽에서 불이 나니 도로는 금세 일 차선으로 좁아졌다.  차가 밀리자, 어르신 몇 분이 나서서 옛날에 많이 듣던 “오라이(all right), 오라이(all right)”를 외치며 교통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다른 운전자들과 “오라이”, “노”, “오케이” 등의 간단한 말과 수신호만으로 소통하면서 트래픽 문제를 해결했다.   준법정신이 투철해서 그랬을까 교통 상황은 제법 원활해졌다. “오라이”는 본토인 미국에서도 통했다. 역시 세계 공통어다.   잠시 후 노란색 안전 조끼를 입고 온 동네 분들이 스톱 사인 판까지 들고 와서 교통정리를 맡았다. 우리보고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밸리에 사는 코리안이라고, 코리안에 힘을 주며 알려줬다.  이때 나는 한국인인 것이 오지게 자랑스러웠다.   그동안 갓길에 누워있던 운전자의 입술이 하얗게 바짝 말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물 묻힌 수건으로 그의 입술을 축여줬다. 그리고 이마와 머리에 붙어 있던 자잘한 돌들도 조심히 물로 씻겨 내리고 피를 닦아 주었다. 선홍색의 피는 따뜻했고 약간 끈적였다.     불붙은 마른 들판은 바람이 없는데도 무섭게 빠른 속도로 타들어 갔다. 달리 손쓸 방법이 없어 불길이 언덕 위로 올라가는 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무섭네”라고 말했다.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잠시 후, 소방차와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휴대폰 신호가 터지지 않는 이곳 데드존을 벗어난 어떤 운전자가 신고를 한 모양이다. 운전자의 친구는 우리에게 고맙다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장로님은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그를 위로했다. 소방차가 오는 것을 보고 우리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날 지역 신문 웹사이트에는 부케 캐년에서 차량 전복 사고로 인해 산불이 발생했었다는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이리나 / 수필가이 아침에 부케 산불 언덕 위로 노란색 안전 백인 남성

2024-08-08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언덕에 대한 소회

새벽 언덕을 걸어본 사람은 안다. 언덕 위로 펼쳐진 안개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만큼 뒷걸음질친다는 것을. 언덕 끝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념 속에 있었다는 것을. 삼척 정라진 언덕을 오르면서 알 수 없는 황홀에 잠겼었다. 땅이 겹쳐 천천히 내게로 다가와 이마를 만지며 뒤로 물러섰고, 작고 투명한 물방울 입자가 온몸을 향해 친구의 이름 위로 날아 올랐다. 풀섶 위로 나지막히 내려 앉은 유리구슬의 유희. 풀벌레 노래하는 새벽 언덕은 한창 무르익은 학예회 무대 같았다. 그날 우리는 언덕을 넘어 작은 통통배를 탔다. 그리고 12시간의 거친 항해 끝에 친구가 기다리는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친구들과 밤 부두를 걸으며 오징어잡이 배들이 켜놓은 휘황찬란했던 집어등의 수만큼이나 그리움이 조각들이 밤 하늘 별만큼 가득히 저미어 왔다.   소학교를 가기 위해 언덕 두 곳을 넘어야 했다. 학교 가까운 언덕은 눈 오는 날이 장관이었다. 사내 아이들은 종이 널판지를 깔고, 책가방을 깔고 눈길을 빠른 속도로 내려왔다. 단발머리 여학생들은 장갑 낀 손을 호호 불며 언덕 가장자리 돌담을 의지해 느린 등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허연 입김을 뿜으며 행복한 웃음꽃이 피어나는 언덕에는 유년의 기억들이 눈처럼 쌓이고 있었다. 이제는 모두 지나가 버린 유년의 기억 속엔 눈 덮힌 하얀 언덕과 마음속으로만 간직했던 한 소녀의 활짝 웃는 모습이 아직도 아롱진다 “퍼얼펄 눈이옵니다. 바람 타고 눈이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져 온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쿼렌시아가 된 Quintin 길의 작은 언덕. 출근 길, 퇴근 길에 들려 먼동을, 노을을 사랑하게 된 언덕. 1990년 초 미국에서 개봉된 시네마 천국(Niobe Cinema Paradiso)의 main theme을 들으며 새벽 언덕에 오르고 있다. 에리오 모리코내가 작곡해 아카데미 영화 음악상을 수상한 곡이다. 호흡을 잃어버릴 만큼 피아노와 Cello의 하모니가 가슴을 쓸어내듯 아프다. 소학교 때 하얗게 눈으로 덮힌 언덕의 소회며, 대학 일 년 때 삼척 정라진 언덕길을 넘으며 새벽 안개처럼 아롱졌던 기억이며, 고향을 뒤로 두고 이제 편해져가는 Quintin 길의 언덕에 피어나는 들풀들의 작은 흔들림마저 모두 나를 지탱해온 의미가 되었다.   내가 아직 노래할 수 있는 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를 지으신 이의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짓에 무릎 꿇지 않은 그의 품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인, 화가)     시카고, 이곳에서도 먼 위스컨신 / 아득한 언덕 두려움 깨는 울림 / 시월의 Holy Hill 붉게 피어 난다 / 휘영찬란 불빛 없고 종소리 사라진 오지 / 다만 그 곳 풀잎 스치는 소리 / 보금자리 찿아 드는 새들의 날갯짓 / 먼 발치 Holy Hill 고요로 가득해 / 한 알이 썩어 많은 열매 맺는 텅 빈 들녘 / 고요의 소리 시월의 Holy Hill / 광야의 나지막한 기도소리 / 아무도 찾지 않는 좁은 길 / 든든히 세워 지는 하늘소리 // 낙엽도 내리고 / 별빛도 내리고 / 하늘 고요도 내리는데 / 광야의 울음 소리 올라가네 / 텅 빈 들판의 손길 기도의 향 올라가네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언덕 소회 새벽 언덕 언덕과 마음속 언덕 위로

20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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